오피니언/칼럼



 

임준제 목사의 오늘의 말씀 묵상- 6.25 사변 74주년(엡2:15)

김영애 기자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엡2:15)

 

  오늘 6.25 전쟁 74주년을 맞이하여 에베소서 2장 15절을 통해 ‘6.25 사변의 교훈’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6.25 사변은 세계 역사상 유례가 드문 민족상잔의 비극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이 목숨과 일터를 잃었고 가족과 친지와 헤어져야만 했습니다. 6.25 발발 74년이 된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런 전쟁의 상처들은 완전히 아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민족은 통일의 방향을 잡고 힘차게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때일수록 6.25 사변의 내용을 살펴보고 우리의 정신 무장을 새롭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특히 우리 성도들의 경우 영적인 측면에서 6.25를 고찰해 봄이 필요합니다. 에베소서 2장 15절을 통해 ‘6.25 사변의 교훈’에 대해 함께 살펴봅니다.

 

  첫째로, 전쟁의 원인이 있습니다

 

  전쟁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그 기원을 같이 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인류는 많은 크고 작은 전쟁들을 치루면서 오늘에까지 이르렀고, 지금도 전쟁의 위험성이 상존하고 있습니다. UN을 비롯한 수많은 국제기구들이 전쟁의 억지와 평화의 정착을 위해서 다각적인 노력을 전개하고 있음에도 이렇다 할 결실을 보지 못했으며, 매스컴들은 오늘도 지구촌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족 분규와 유혈 충돌의 가능성을 큰 글자로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인류는 마치 언제 폭발하게 될지도 모르는 전쟁의 위험성이라는 화약고 위에서 살아가는 것과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쟁은 억지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그 원인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첫째, 교만한 다툼입니다: 6.25 사변의 근본 원인은 북이나 남이나 서로 자기 체제가 우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북한의 경우 공산주의를 이 나라 전체에 심으려는 잘못된 의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역사적으로는 물론이고 신앙적으로까지 잘못된 공산주의를 이념을 위해 전민족을 배반하고 팔아 먹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참으로 우월한 제도는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타락하였기 때문입니다(창 3:17).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라고 성경 말씀하고 있는데(잠 16:18) 이렇게 서로 자기 체제의 우월성을 주장하며 다투게 된 것이 6.25 동란의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둘째, 미움 때문입니다: 사실 모든 전쟁의 원인은 미움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남북간에 서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도가 넘어서 미움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공산주의의 핵심 이론은 계급 투쟁입니다.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자본 계급을 물리쳐야 한다는 미움을 그 핵심 이론 속에 담고 있습니다. 때문에 금세기에 들어서 공산주의가 파괴되고 있지만 세계 대부분의 전쟁과 관련이 있는 것은 공산주의 사상 때문임은 사실입니다. 그들은 미움을 근거로 태어난 잘못된 정치 체제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한 자요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였다고 했는데(요일 3:8). 김일성 집단은 공산주의라는 마귀의 역사에 현혹되어 동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했던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뜻에 대한 무지입니다: 민족간의 분규라든지 나라간의 전쟁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 예를 들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치루는 전쟁이라든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불의한 나라 혹은 세력들과 맞서서 싸우는 전쟁들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영토확장이나 지배욕이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하게 마련인데,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하게 마련인데,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므로, 이 경계를 침범하는 것은 의로운 행위로 간주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무지한 자는, 하나,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습니다; 전 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사람의 본분이요 성공적인 삶을 위한 지혜의 근본인데, 호전가들은 하나님께 대한 외경심이 없기 때문에 임으로 다른 나라, 다른 민족의 경계를 범하고자 시도합니다. 사람이 지켜야 할 기본 도리를 무시하는 것이며, 누구라도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으면 이와 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 경외하는 법을 가르치도록 힘써야 합니다. 사람이 도리를 망하게 되면 이미 사람이기를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가 되기 때문에 합당치 못한 일들을 힘쓰게 마련입니다. 둘,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주권을 부인합니다;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인간이지만, 역사를 만들고 이끌어 가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시간이라는 모래밭 위에다 커다란 발자국을 남기고자 하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것을 모르고서는 하나님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기가 쉬운데, 전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군사력과 군비를 지나치게 보유하여 세계적으로 위협적인 존재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쟁 억지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때 가능하게 됩니다. 넷째, 이기적인 탐욕의 결과입니다: 한 나라의 지배자로 만족할 수가 없어서 세계의 지배자가 되고자 칼을 뽑아 들었던 인물들이 여럿 있는데, 우리는 이들의 꿈을 결코 아름다운 것으로 미화시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인권이 존중되어야 하듯이 국권 역시도 존중되어야 하는 법이며, 따라서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이기적인 탐욕에 이끌린 어리석은 자들이지 결코 영웅일 수가 없습니다. 국권 수호를 위한 싸움은 의롭고 정당한 것으로 평가됨이 마땅하지만 이기적인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싸움은 범죄인 것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전쟁을 억지하려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필요합니다. 하나, 탐욕을 부단히 경계해야 합니다; 엡 5: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전쟁을 일으키게 된 것도 그를 지배하고 있던 탐욕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듯이 탐욕은 심각한 문제점과 부작용들을 낳는 가장 큰 요인이 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이것을 부단히 경계해야만 합니다. 개인에게나 국가에게나 탐욕은 어떤 선한 것도 가져다 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탐하는 마음을 우상 숭배와 동일시하고 있으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탐욕을 철저히 멀리하도록 경고합니다. 둘, 경계를 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행 17: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거주의 경계를 한하신 이가 하나님이시라면 우리는 어떠한 명분으로도 그것을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크고 작은 대개의 문제들이 발생하게 되는 원인은 경계를 넘어서는 데 있기 때문에 자제가 필요합니다. 인류가 그토록 많은 전쟁의 역사를 기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분수를 모르고 경계를 넘어서는, 탐욕에 이끌리는 무리들이 많았기 때문이며, 이런 사람들이 바로 인류의 공적입니다. 다섯째, 사탄의 책동입니다: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평화를 파괴하는 전쟁에는 사탄의 책동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어두운 세상 주관자로서 파괴적인 임무에 열중하기 때문에 전쟁을 억지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먼저 그의 존재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의 책동을 막도록 힘써야 합니다. 하나, 미혹을 경계해야 합니다; 계 12:9,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사탄을 가리켜서 요한은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증거했는데, 그의 속성이라든가 역할을 잘 나타내는 말입니다. 사탄은 성도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서는 것을 조금도 기뻐하지 않기 때문에 그릇된 길로 행하도록 부지런히 미혹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존재와 역할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은 그의 책동에 따라서 움직이게 됩니다. 둘, 부단히 절제해야 합니다; 사탄의 책동을 막는 길은 절제 밖에 없습니다. 그가 무슨 제안을 하든지 단호히 거부하고 절제할 때 전쟁은 충분히 억지될 수가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런 지혜를 갖지 못한 까닭에 오늘도 전쟁의 가능성이 팽배한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종류의 힘은 절제라는 브레이크가 제대로 작동될 때 인류에게 유익을 줄 수 있습니다. 물론 전쟁의 원인을 알았다고 당장 그 해결책을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우리 성도들은 무엇이 최상의 치유 방법인지 궁구할 수 있으며, 점진적으로 그 방법을 활용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최신에 무기들을 계속적으로 개발하는 등과 같은 군비증강만으로는 전쟁의 억지가 불가능하며, 해결의 지름길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탐욕을 버리며, 사탄의 제안을 거부하는 것뿐입니다.

 

  둘째로, 전쟁의 내용이 있습니다

 

  6.25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치룬 우리 민족은 전쟁의 참상이라는게 어떤 것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비록 전후 세대인 요즘 젊은이들이 사회주의를 찬양하며 북한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가진 것처럼 보이기는 하더라도, 그때의 아픈 응어리들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한으로 맺혀 있으며, 그때의 상처들이 우리나라의 구석구석에 남아서 전쟁이 무엇인지를 말없이 증거해 줍니다. 전쟁을 찬양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전쟁을 최상의 무기로 생각하는 호전가들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음을 볼 때 전쟁의 내용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은 매우 유익합니다. 첫째, 전쟁은 비극을 불러옵니다: 하나, 동족상잔의 비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일곱 족속을 그들의 우상 숭배로 인하여 한 명도 남기지 말고 멸하라고 하셨지만 에돔 사람의 경우는 미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신 23:7). 에돔 사람은 원래 야곱의 형제인 에서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창 25:23). 이렇게 형제까지 우애하고 사랑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요 당연한 본분입니다. 그런데 공산주의자들은 자기의 사상을 금수강산에 퍼뜨리기 위하여 피나는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 결과 6.25는 참된 승자가 없는 전쟁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남북이 서로 패배자가 되었고 서로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둘, 이산가족의 비극입니다; 6.25로 인해 많은 이산가족이 생겼습니다. 정확한 통계는 알 수 없으나 남북을 통틀어 약 일천만 명의 이산가족이 있다고 합니다. 이 이산 가족 중 극히 제한된 소수가 가끔 정치적인 만남을 갖기도 했지만 대부분 서로의 생사를 알지 못한 채 그리움을 삭이고 사별하고 있습니다. 남북통일에 대한 대화가 있기 이전에 이산가족에 대한 문제가 많이 논의되었습니다. 별로 나아진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이산가족의 아픔을 생각한다면 통일 이전이라도 자유 왕래나 다른 방법을 통해 이산가족들이 서로를 부둥켜 안을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셋, 신앙 상실의 비극입니다; 북쪽 이스라엘 열 지파의 왕이 되었던 여로보암은 민족 분단 후에도 북쪽 백성들이 제사나 다른 종교적 행사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니까 그를 막기 위해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그를 섬기도록 했습니다(왕상 12:27). 나라의 분단이 신앙적 분단으로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한때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웠던 평양도 지금은 신자들이 거의 없는 불신앙의 도시로 변했습니다. 하나님을 처음부터 아예 부인하는 공산주의 사상에다가 본격적인 박해까지 겹쳐 그렇게 많았던 성도들이 다 없어졌습니다. 이처럼 정치적인 분단은 신앙적인 폐해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반대로 통일이 되면 우리는 민족 복음화를 위해 반드시 선교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둘째, 인명의 살상입니다: 전쟁에 필연적으로 따르게 되는 것은 인명의 살상이며, 이것은 규모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모든 전쟁에서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총을 들고 전장에 나가서 싸우는 군인들만 죽는 것이 아니라 전쟁과 전혀 무관한 노인들, 어린아이들, 부녀자들도 희생이 됩니다. 포탄이나 미사일은 눈이 없기 때문에 사람을 구별해서 살상하지 않습니다. 죽어서는 안 될 사람도 죽게 만들고, 상해서는 안 될 사람도 상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역사에 기록된, 인류가 지금까지 치뤄 온 전쟁들이 바로 이런 것들이었으며,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가치의 중요성을 새로이 인식하게 됩니다. 하나, 생명의 가치입니다; 마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목숨을 바꾸겠느냐.’ 크고 작은 전쟁들을 통하여 희생된 수많은 생명들은 이 세계의 어떠한 것을 주고서도 바꿀 수가 없는 귀한 것들임에도, 어리석은 모험주의자들, 영웅주의자들, 권력의 광신자들로 인해 죽어야만 했습니다. 주님은 한 생명, 한 영혼의 가치를 '온 천하'보다도 위에 두셨는데, 저 어리석은 자들은 이처럼 귀한 것을 어리석은 목적을 위해 희생시킨 것입니다. 생명을 경시하는 자들의 모든 계획은 악한 것이며,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그들의 어떤 모의에도 참예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생명의 가치를 바로 아는 사람들은 섣불리 전쟁을 시도할 수가 없습니다. 수많은 생명을 희생시켜 얻은 세속적 영광은 어떠한 명분으로도 위대한 것처럼 미화시켜서는 안 됩니다. 둘, 평화의 가치입니다; 엡 2: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전쟁의 쓰라림, 가족을 잃고, 몸의 한 부분을 잃는 아픔을 경험한 사람들은 평화가 인류 사회의 행복을 위해 얼마나 긴요한 것인지를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느끼게 마련입니다. 평화의 가치를 모르는 자가 평화를 지킬 수 없습니다. 평화가 소중한 것임을 알지 못한다면 전쟁은 앞으로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정부가 전쟁 억지를 위해서 다방면으로 노력하는 것도 6.25를 통하여 평화의 가치를 뼈저리게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가치 있는 것은 지켜야만 합니다. 셋째, 도시의 파괴입니다: 전쟁은 사람만 살상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도 파괴합니다. 수천 년 혹은 그 이상의 장구한 세월 동안 가꾸고 건설해 온 문화 유적들도 부숴버리고, 사람에게 필요한 물품들을 생산, 공급하는 공장들도 파괴됩니다. 상당한 기간 수고하여 이룩한 모든 것들을 아주 쉽고 간단하게 파괴해 버립니다. 이러한 사실은 사람이 땅 위에 쌓아 두는 모든 것들은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다는 다소 긍정적인 교훈을 주기도 하지만 이로 인해 야기되는 문제는 심각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 고난의 악순환을 낳습니다; 도시의 파괴는 경제의 파국이라는 필연적인 결과를 가져 오게 마련입니다. 포탄을 비롯한 전쟁 무기들은 파괴용일뿐 생산적인 역할은 전혀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것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것이라곤 고통뿐입니다. 우리는 전후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고통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때를 생각할 줄 알아야 오늘의 풍요를 제대로 누릴 수 있고, 그러한 비극이 재현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생활이 나아졌다고 향락이나 추구하는 사람들은 나라의 장래를 어둡게 만드는 자들입니다. 둘, 절제의 중요성을 알게 합니다; 형편없이 파괴되어 버린 폐허를 통해서 사람들은 절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힘이 있다고 모두 좋은 것은 아닙니다. 절제가 따라야만 그 힘이 인류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것이지 절제가 따르지 않으면 파괴만 가져다줄 뿐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경우도 다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모든 나라, 모든 사람은 절제라는 제동 장치를 늘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넷째, 노략과 약탈이 있습니다;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인간의 추악한 여러 가지 모습들의 잔재가 남게 마련인데 그것은 바로 노략과 약탈입니다. 닥치는 대로 남의 집에 들어가서 귀중품을 빼앗고, 연약한 부녀자들을 겁탈하고, 잔인한 짓들을 서슴치 않는 것이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묵인되고 있습니다. 하나, 윤리와 도덕의 실종입니다; 전쟁이 치뤄지는 곳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한 가지 현상은 윤리와 도덕의 실종입니다. 힘이 있는 사람들이 윤리나 도덕이라는 최소한의 규범을 무시한채 충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전쟁의 정사 이면에 기록된 야사라 합니다. 성적 충동에 따라 닥치는 대로 부녀자들을 겁탈하고, 소유 충돌에 따라 아무의 것이든지 가로채는 불법 무법 지대가 전장입니다. 둘, 노출되는 인간의 완악함입니다; 전쟁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이 어느 정도 완악한 존재이며, 어느 정도까지 악하게 될 수 있는지를 새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월남전에 직접 참예했던 사람들은 이런 광경을 수없이 목도했을 것입니다. 예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구원의 희망이 없는 게 바로 우리 인간들입니다. 전쟁은 희망적인 어떤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얻은 것보다는 잃는 것이 많기 때문에 오늘의 세계는 국수주의 자들, 모험주의 자들, 영웅주의자들을 부단히 경계하여 전쟁이 더 이상 발발하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이 일은 복음 전도를 통해서만 가능하게 되기 때문에 선교의 책임을 맡고 있는 교회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 세계에 대한 가장 중요한 책임을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셋째로, 전쟁의 결과가 있습니다

 

  전쟁의 결과는 너무나 참혹한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사상자를 내었으며 남편을 잃고 자식을 잃은 사람들의 통곡 행렬이 줄을 이었습니다. 집은 불타고 농토를 빼앗긴 피난민들은 대책 없이 도시로 몰려 들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일제의 침략으로 늦어진 경제 시설들이 다 불타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런 외형적인 것들 외에 정서적인 고통도 적지 않았습니다. 또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비극들이 잉태되었습니다. 우리는 6.25로 인한 전쟁의 비극을 다시 되새기며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다짐하게 됩니다. 첫째, 민족 분단입니다: 전쟁의 결과 민족 분단이 고착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김구 선생을 비롯한 민족 지도자들이 통일을 위해 노력했습니다만 나중에는 그나마도 금지되고 남과 북은 물과 기름처럼 분리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솔로몬의 뒤를 이은 르호보암 왕의 교만과 잘못으로 이스라엘이 둘로 분단된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왕상 12:16).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역사적으로 많은 전쟁이 있었습니다(왕상 14:30). 만약 우리 민족이 통일을 이루어 내지 못하면 앞으로도 이런 추세가 계속될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통일을 이루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 정치적 분단입니다; 통일 신라 이후 한 나라 한 민족을 이뤄 오던 우리나라는 6.25로 인해 갈라진 휴전선이 국경 아닌 국경선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서로가 서로를 잡아 먹지 못해, 마치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이 서로 전쟁을 벌이며 원수지간이 되었던 것처럼(왕상14:30) 전쟁을 방불케 하는 상황 속에서 지내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분단되었을 뿐 아니라 서로의 문화도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남쪽은 전통문화를 이어 갔지만 북한은 사회주의에 기초한 문화를 세웠고 나중에는 서로 말까지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민족 분단은 단순한 나누어짐이 아니라 이렇게 복합적으로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서 둘로 쪼개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보면서 다시금 민족 분단의 비극을 새겨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세대에 통일을 이루어 우리의 다음 세대까지 이런 비극이 이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둘, 사상적, 신앙적 분단입니다; 솔로몬의 아들이 르호보암의 실정으로 북쪽 이스라엘의 정권을 잡게 된 여로보암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이 여호와께 제사를 지내려고 예루살렘으로 내려가곤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백성들이 신앙심을 이용할 목적으로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세우고 이를 여호와라고 선전했습니다(왕상 12:29). 또 레위 자손이 아닌 보통 백성을 제사장으로 삼아 세웠으며 유대의 절기와 비슷한 절기들을 만들었습니다(왕상 12:31). 그전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긴 일이 있었지만 이제는 본격적으로 통치자가 앞장서 자신의 정치적 욕심을 위해 백성들을 우상 숭배로 이끌었습니다. 북한의 김일성(김정일, 김정은)도 자신의 독재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기독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를 없애고 주체사상이란 우상 신앙을 생각해 내었습니다. 현재 북한은 주체사상에 의해 통치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민족 분단은 이렇게 참신앙까지 훼손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둘째, 남북간의 미움입니다: 하나, 남북간의 이질성입니다; 우리는 반만년의 역사를 지닌 문화 민족이고 오랫동안 한 민족을 이루어 온 전통있는 민족입니다. 그런데 남북으로 나뉜 뒤 서로간에 깊은 미움의 골이 생겼습니다. 북한은 남한을 미워하고 유치원 어린이때부터 미움을 가르쳐 왔습니다. 또 남한은 북한의 하는 일들을 국제 사회에서 방해해 왔고 외교적으로 고립시켰습니다. 이렇게 남북간의 미움이 쌓일 때 나중에는 통일도 불가능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간의 미움은 이제 주체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남북간에 해결되어야 할 가장 큰 문제는 이렇게 미움을 바탕으로 하는 이질감입니다. 또 이런 미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신앙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둘, 사랑과 화해가 필요합니다;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어찌 보면 공산주의야말로 기독교의 가장 큰 원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 나라에서는 공식적으로 기독교를 금지시켰고 신앙인들을 핍박하였으며 많은 선교사들을 죽음에 몰아 넣었기 때문입니다. '루스 터커'란 학자에 의하면 1, 2세기에 죽은 순교자보다 20세기의 순교자들의 수가 훨씬 더 많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많은 선교사들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살해를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물며 동족인 북한을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할 수 있거든 모든 이로 더불어 화평하고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게 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인의 책임입니다(롬 12:18).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은 남북으로 나뉘어진 미움을 풀고 화해하는 일에 앞장 서야 합니다. 셋째, 이방 민족의 지배입니다: 남북으로 나뉘어져 국력이 약해지니 남쪽 유다나 북쪽 이스라엘은 많은 외적의 침입을 받았습니다(왕상 20:1). 그들 대부분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이스라엘의 지배를 받던 나라와 지역들이었습니다. 이처럼 나라가 나뉘고 약해지면 이방 민족의 침입을 스스로 자초하게 됩니다. 결국 북쪽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멸망당하였고 남쪽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하였습니다(왕하 25:1). 만약 우리 민족이 계속 분단되어 서로를 물고 뜯으면 결국은 서로 멸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다윗의 시대 때 가장 큰 나라를 이루었습니다. 다윗은 블레셋, 암몬, 시돈, 에돔 기타 여러 나라들을 이스라엘에 복속시켰고 그 영토는 요단 건너편에서부터 유다 남쪽인 브엘세바까지 이르렀습니다(삼하24:5). 그런데 남북으로 나누어지고 국력이 약해지니 한 때 종속되었던 나라들이 독립되는 것은 물론 오히려 이스라엘을 넘보게 되었습니다. 아람 왕 벤하닷은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로 쳐들어오기도 하였습니다(왕상 20:1). 그리고 결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남쪽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하고 말았습니다(왕하 25:1). 이렇게 민족이 분열되면 그 힘이 약화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나라는 러시아, 중국, 일본 등의 강대국들에 의해 에워싸여 있습니다. 또 그들 나라 대부분은 우리나라를 침략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지배를 받지 않으려면 반드시 통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작은 국토임에도 동족상잔의 쓰라린 과거를 가진 분단 민족입니다. 전쟁이 가져다준 손해와 고통은 실로 막대한 것이었습니다. 일천만 이산가족의 아픔, 경제적 손실, 문화발전의 단절과 이질화, 신앙 자유의 수탈 등 수십여 년 이상 전쟁이 가져다준 아픔은 이 나라 도처에 산재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분단의 아픔은 더욱 크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일은 급변하는 국제 정세가 통일에 대한 긍정적 환경을 조성해 주면서, 국민적 통일 열기가 고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전쟁이 가져다준 분단의 극복 과제에 대한 통일에의 열망을 가져야 합니다. 남북 전쟁의 원인은 서로에 대한 미움과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서로 자기 체제가 우월하다고 주장하며 그를 강요하는 과정에서 북한은 남한을 침략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전쟁으로 수많은 이들이 죽고 다쳤으며 이산가족이 되어 헤어짐의 아픔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또 북한에는 기독교인들이 거의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민족 분단이 고착되었고 잘못하면 이방 민족의 지배를 자초할지 모르는 형국입니다. 전쟁의 결과 우리 민족은 정치, 경제, 지리적으로만 둘로 나뉜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나뉘었고 서로간에는 마음의 깊은 골이 생겼습니다. 이렇게 우리 민족이 분열되면 외국의 지배를 또다시 받게 되지 않는다고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는 누구보다 남북이 하나되는 데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 통일을 기도함으로써 통일에 앞장서는 역군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반드시 통일을 이루어 내야 합니다. 통일 만이 우리 민족이 살 길입니다. 우리 민족이 통일되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그동안 쌓였던 미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통일은 반드시 이루어야만 하는 민족의 열망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 되시고 둘을 하나로 만드시고 중간에 막힌 담을 허셨다고 했는데(엡 2:14) 그런 주님의 역사를 힘입어 우리 성도들이 앞장 서서 남북 통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휴전선은 반드시 무너질 것입니다. 오늘의 한날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으로 남북이 통일되는 역사가 이루어지도록 기도합니다.  

 

여호와 샬롬 !

 

  기도 골방에서 작은 종 임준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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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김영애 기자    기사입력 : 24-07-01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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