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9일 인천광역시 남동구에 위치한 은곡교회에서 [마르틴부쳐연구소 개소식]이 있었다.
이날 감사예배는 총2부로 구성하였으며, 1부 예배 순서자로는 연구소장 최준혁 목사가 사회를 맡았으며, 나신천 목사(前 백석대학교 교수)가 기도를, 정동완 목사(온천하선교교회)가 겔34:11-16절 성경봉독을, 심포니아중창단이 특송을, 이은선 목사(前 안양대학교 교수)가 “참 목자와 참된 목회”란 제하의 설교를 하였다.
▲ 마르틴부쳐연구소장 최준혁 목사
이은선 목사는 전하기를, 종교개혁 506주년을 기념하는 예배 시간에 마르틴 부처 연구소를 개소하려고 모였는데 잊혀진 신학자 마르틴 루터를 연구소를 개소하는 의미를 생각해 보고 부처가 생각했던 참된 목장 그리고 참된 목회가 뭔지 소개했다. 잊혀진 신학자라고 하는 별명이 붙게 된 이유는 많은 사람들에게 연구가 되지 못해서 잘 알지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조직을 잘 해서 감리교가 세워졌다며, 한국교회에서 장로교회가 따라가고 있는 개혁 신학을 연구하는 데 가장 영향을 미친 사람은 칼빈과 쯔빙글리, 마르틴 부쳐이다.
한국의 칼빈 연구자들이 세계에서도 부럽지 않을 만큼 많이 있다. 개혁 신학의 원조인 쯔빙글리를 연구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부쳐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으며 매우 적다. 부처가 예배를 개혁해서 칼빈의 예배가 장로교회가 드리는 예배의 원형이 되었으며, 칼빈이 제네바에서 종교 개혁할 때는 장로라는 말을 몰랐다. 평신도 지도자 가운데 경건한 사람을 세우려고 했는데 이미 장로 같은 제도가 있었고 집사라는 제도도 배우게 되었다. 칼빈의 개혁 신학이 만들어지는데 많은 영향을 줬던 것이 마르틴 부쳐이다.
마르틴 부쳐 사람들의 영혼을 돌보는데 성도들을 5가지로 구분한다. 성도들의 영혼을 돌보는 방안을 연구해서 그들을 잘 먹일 때에 성도들의 영혼을 제대로 돌보는 것이며, 그런 목회자가 참된 목회자가 되겠다는 것이고 종교개혁의 목표가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목사님은 마르틴부쳐에 관한 모든 것에 애정을 갖고 열심히 찾아다니시고 논문을 쓰시는데 은곡교회를 통해서 마르틴부처 연구소가 개설되어 우리의 개혁 신학이 다시 한 번 꽃피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망한다고 했다.
2부 개소식 순서자로는 최준혁 목사가 연구소 개소 경위 설명을, 최윤배 목사(前 장신대학교 교수)와 강경림 교수(前 안양대학교 교수)는 영상을 통해 축사를, 박신범 목사(동성교회 원로목사)와 정석현 목사(대중교회 원로, ICS 이사장), 안인섭 목사(총신대학교 교회사 교수), 김승광 목사가 축사를, 문병하 목사(전 그리스도대학교 교수, 디모데선교회 대표)와 이기현 목사(수원예닮교회)가 격려사를, 코리아아트빌리티체임버 강미사 대표가 축하 연주를, 은곡교회 이정규 장로가 광고를, 김귀중 목사(인성교회 원로목사)가 축도를 각각 순서를 맡았다.
▲ 정동완 목사(온천하선교교회)
연구소장 최준혁 목사는 인사하기를, 종교개혁 506주년, 은곡교회 설립 39주년 기념주일에, 종교개혁자'마르틴 부쳐 연구소'를 개소하게 되니, 오늘은 매우 소중한 날이라며, 그동안 연구소 개소를 위해 후원하신 은곡교회 성도들, 특히 기금을마련해 주신 분들과 개소식에서 순서를 맡아 수고해 주신분들, 그리고 축하하러 오신 지인들에게 감사드리며, 연구소 오픈을 적극 지지하며 영상으로 축하해 주신 한국교회의 마르틴 부쳐 1호 박사, 최윤배 교수님께도 감사드린다고 전하며, 제가 받은 복이 매우 큰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목사가 되고 싶었는데 예장합동 교단의 목사가 되었으니 그 꿈이 이루어졌고, 신대원 2학년때 개척한 은곡교회에서 39년 동안 한 교회만을 섬기며 여기까지 왔으니 하나님께서는 겸하여 여러 신학교에서 강의할 기회도 주셨고, 덤으로 목회학 박사 학위(D.Min)를 허락하셨고, 이것도 과분한데 마르틴 부쳐를 연구한 덕분에 신학석사와 신학박사(Ph.D) 학위를 취득하게 하셔서 하나도 힘든데 두 개의 박사학위까지 취득했고, 이제는 “마르틴부쳐연구소”까지 개소하게 되었으니 한량 없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다.
큰 은혜를 받다 보니 책임감도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받았으면 주어야 하기 때문이기에 미력하나마 “마르틴 부쳐 연구소"를 개소하게 되었다. 마르틴 부쳐는 종교개혁이 있은 후 500년이지났지만 아직도 우리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정작 개혁 교회의 틀을 세우고 목회사역의 전반에 걸쳐 크게 공헌한 인물인데도 부정적으로 알려지거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잊혀졌다. 루터와 칼빈 연구는 풍부하지만 부쳐 연구는 빈약하고, 루터와 칼빈의 연구서적은 많지만 부처에 관계된 연구서적은 단 몇 권에 불과한 한국 교회의 현실이 안타까워 미력하지만 저만이라도 부쳐의 사상과 사역들을 알리고 싶다고 했다.
70살을 바라보는 나이에, 다른 사람들은 하던 일도 마감하고 은퇴하는 나이에, 원전(原典)을 읽으려면 영어는 필수이고 독일어와 라틴어와도 씨름해야 하는데, 왜 그런 고통을 감수하려고 나서는지, 비용도 많이 들고 동역해야 할 사람도 많아야 하는데 과연 감당할 수 있을지 … 그러나 제가 경험한 하나님의크신 도우심을 확신하기에 용기를 냈으며, 그를 연구하면 할수록 제 마음이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쁘다고 했다.
오늘의 출발은 다른 이들도 부쳐 연구에 동참할 수 있는 마중물이 될 것이므로 바라기는 주님이 부르시는 순간까지 연구실에서 부쳐의 작품들을 깊이 연구하고 싶으며, 연구사역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풍성한 결실이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후원해 주시기 바란다고 하였다.
마르틴부쳐는 1491년 11월11일 독일 슐레트슈타트 출생으로 수도사와 사제서품을 받았으며, 하이델베르크 논쟁에 참석하였으며,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고, 결혼후 비셈부르크에서 목사로 사역하다 1523년 2월 수파이어 감독에의해 출교 파문당하여 슈트라스부르크로 가서 살았다. 후에 여러 대소요리문답과 주석 등 여러 서적을 출간하였고, 박사학위 받고, 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사역하였고, 1523년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종교개혁을 시작, 1529년에는 ‘미사’제도 폐지 했고, 쯔빙글리 사망으로 부쳐가 개신교 의장으로 사역했고, 슈트라스부르크 노회장을 역임하고, 라틴어학교를 통합해 짐나지움을 설립했으며, 부쳐의 초청으로 칼빈이 3년간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지내게 되었고, 이시기인 1541년 발간된 슈트라스부르크 시편찬송가집에는 마르틴 부쳐가 작성한 서문이 있다. 이해에 흑사병으로 자녀와 아내를 잃었으며, 다음해에 재혼후 가족교회 형태의 “기독교공동체”를 조직하였다. 1549년 모든 직무를 박탈당하였고, 찰스5세 황제의 압력으로 슈트라스부르크를 떠나서 토마스 크랜머의 초청으로 종교개혁을 돕기위하여 영국으로 망명하여 신학박사학위를 받아 케임브리지 대학 흠정 신학교수로 있다가 1551년 사망하였다.
1556년 메리여왕이 부쳐를 이단으로 정죄하여 무덤에서 파낸 부쳐의 시체와 저작품들을 공개적으로 불태웠으며, 1560년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 의해서 부쳐의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케임브리지에서 부쳐의 무덤과 기념관의 예전적 봉헌이 동반되었다.
▲ 박신범 목사(동성교회 원로목사, 예장(합동)총회 인천노회)
▲ 안인섭 교수(총신대학교 교회사)
▲ 문병하 목사(전 그리스도대학교 교수, 디모데선교회 대표)
▲ 이기현 목사(수원예닮교회)
▲ 최준혁 목사 내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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