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기획: 시편으로 찬송해야 하는 이유[2]
내용이 조금 길지만 분명히 주의 깊게 읽고 감동을 받는 성도가 계실 줄 믿습니다.
분명한 이유가 있기에 강조를 드립니다.
칼빈과 마로가 주축이 되어 제네바 시편찬송가를 만드는 중에 마로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1544년)
마로는 죽기 전에 베자(Theodore Beza)를 후계자로 임명한 상태였습니다.
베자는 칼빈의 적극적인 설득으로 제네바 시편찬송가를 마무리 하여 제네바 시편찬송가의 최종판이면서 장로교의 최초 찬송가이기도 한 Pseaumes odante trois David(1551, 1554)를 만들었으며, 그 최종판은 1562년에 완성되었습니다.
이 시편찬송가는 시편과 십계명, 시므온의 노래 등 110개의 운율과 125개의 곡이 사용되어 총 152개의 본문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제네바 시편찬송가의 출판현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Witvliet는 Pierre Pidoux의 글을 인용하여 1562년 초판이 제네바에서만 적어도 27,000부가 출판되었으며, 프랑스와 스위스의 출판사 50군데에서 30,000권에서 50,000권 사이가 인쇄된 것을 비롯하여 불과 몇 년 사이에 9개국 언어로 번역되어 거의 100,000부가 인쇄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제네바 시편찬송가는 넓게는 16세기 종교개혁이라는 분위기에서, 그리고 그 동안 로마 가톨릭에서 수행해온 미사와 다양한 복음주의를 교정하는 차원에서, 그리고 좁게는 칼빈이 고국 프랑스를 떠나 스위스와 독일 일부의 프랑스 난민이라는 독특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1.2, 칼빈과 시편찬송가
제네바 시편찬송가에는 음악에 대한 칼빈의 이해가 반영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루터는 음악을 즐겼고 루터 자신이 음악에 재능이 있었던 것과 비교하여, 칼빈은 음악을 비롯한 예술에 문외한이었으며 예술 자체를 혐오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술에 대한 칼빈의 태도를 종교개혁 일반적 개념과 칼빈의 종교개혁을 특징짓는 본질 중의 하나로 인식하는 경향도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칼빈은 창세기 주석에서 유발이 수금과 퉁소 만드는 자의 조상이 된 것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습니다.
[이것(악기들)은 우리의 필요(our necessity)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쾌락(our pleasure)을 위한 것들이다. 쾌락은 정죄를 받아 마땅하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결합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 이것이 음악의 특성이다. 음악은 종교적인 의식에 활용될 수 있고, 사람들에게 유용할 수 있다. 악한 유혹과 어리석은 즐거움에 구속되지 않는 경우에 한해서 그러하다.]
칼빈이 유발에 대해 언급한 내용의 옳고 그름을 떠나, 칼빈은 음악에 무관심하고 부정적인 입장을 가졌던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정말 칼빈은 음악을 혐오했는가?
칼빈이 음악에 대해 엄격한 태도를 지녔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된 것은 칼빈이 예술을 적대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로마 가톨릭의 체계를 적대시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더 많았다고 보여 집니다.
사실 칼빈은 창세기 주석에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이 그분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면서, 문화적인 측면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문화에 대한 칼빈의 고결한 견해에도 불구하고 그가 처음에 찬송에 관심을 갖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 시대적 정황으로서 로마 가톨릭 교회가 끼친 영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당시 교황 체제아래에서 드리던 예배는 [외적인 의식과 심지어 주술적인 행습]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개신교 종교 개혁 이전에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노래하는 것과 관련하여 교회의 공적인 의회에서 결정한 내용들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결정들은 찬송에 대한 칼빈의 생각에 직접,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음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음악에 대한 칼빈의 입장과 신학은 그의 [제네바 시편찬송가]에 나타나 있습니다.
찬송에 대한 칼빈의 이해와 그의 찬송 정신을 살펴봅니다.
1.2.1, 시편찬송의 정신
찬송에 대한 칼빈의 입장을 알 수 있는 것은 [제네바 시편찬송가]의 서문에 있습니다.
여기에서 칼빈은 먼저 주일성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주님께서 예배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 가르치신 것을 예배의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오늘날의 주일성수는 교회에 따라서 상당히 손상이 되어 있는 현상입니다.)
영적인 회집이 이루어진 교회에서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말씀, 설교와 기도, 그리고 성례전의 집행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날의 성례전에도 상당한 오류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개혁교회의 예배와 순서는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명령하신 것과 부합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거행되던 예전들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시행되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기도도 항상 라틴어로 거행되었기에 듣는 사람들은 그것을 [중얼거림과 막연한 말 또는 의미 없는 소음]으로 인식했으며, 세례 의식은 신적인 권위가 결여되고 인간들이 만들어낸 어리석은 고안들로 둔갑했고, 성만찬은 더더욱 더럽혀져 불경스럽게 되었습니다. 칼빈은 이것을 마치 [마술사가 그의 주문을 외우는 것과 똑같다.]고 평가하였습니다.
그리고 칼빈은 예배의 3요소(설교, 기도, 성례전)를 각각 언급하면서 기도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기도는 두 종류로 나뉜다. 기도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노래로도 할 수 있다.]고 그는 찬송을 기도와 연관시켰으며, 이런 점에서 찬송은 다른 음악과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찬송과 관련하여 칼빈이 언급한 말을 직접 인용해봅니다.
[노래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불타오르게 하여 열정으로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한다. 그래서 노래는 가볍거나 하찮게 불러서는 안 되고, 중후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불러야 한다. 그래서 식탁이나 가정에서 사람들이 흥을 돋게 하는 일반음악과 교회에서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부르는 노래는 큰 차이가 있다.]
칼빈이 말하고 있는 교회에서 부르는 노래는 물론 시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왜 반드시 시편을 불러야 하는가?
칼빈은 [시편 주석] 서문에서 시편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바르게 기도하는 참된 방법을 지도하는 것은 물론이고, 하나님께 [찬송의 제사를 드리는 바른 방법]과 [바른 태도를 완벽하게 가르친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이런 이해에 따라 칼빈은 시편 중에서 [지혜의 시] 또는 [고백의 시]를 선정하여 그 시에 운율을 붙여 찬송으로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제네바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에서 고백의 기도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특이하게도 시편찬송가 중 상당히 많은 부분이 애가(Lament)와 시편 저자가 원수에 의해 어려움을 겪는 내용으로 이루어졌고, 찬송시(Psalms of Praise)는 적은 비율만이 반영되었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입증이 됩니다.
1539년 시편찬송가에서는 22개 곡 중에서 오직 3개가 찬송시이고, 1543년판에서는 오직 4개만 찬송시였습니다.
Witvliet은 이처럼 [제네바 시편찬송가]에 통회와 애가의 내용이 많은 이유를 칼빈이 자신을 다윗의 고난과 일치시키면서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시편에서 발견하려는 데 있었다고 해석합니다.
칼빈은 어느 누구보다도 예배에서 찬송의 비중을 강조했습니다.
이 점에서 그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찬송 인도자들(cantores)에게 요구되는 [찬송 규칙(Regulae canonicorum)]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여 집니다.
이 규칙에는 찬송 인도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갖추라고 규정되었습니다.
(1)겸손과 절제와 고상함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2)음악적 재능이 없는 사람들은 노래하지 말아야 하며,
<칼빈의 이 말은 맞지 않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마음으로 찬양을 하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고전14:15)[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3)시편은 너무 빠르게 부르지 말고, 음정을 너무 높게 잡지 말아야 한다.(악상대로 불러야 함.)
(4)시편은 가사를 분명하게 발음하고, 노래하는 사람의 마음을 반영하도록 단조롭게 부르며, 회중들의 귀에 매혹되게 불러야 한다.
그래서 칼빈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노래를 아름답게 부르는 것보다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 믿고, 이와 같은 찬송의 정신을 [기독교 강요]에서 다음과 같은 표명하였습니다.
[기도나 찬송이 목구멍에서만 나오고 마음의 감동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가치도 유익도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 몸의 여러 부분에서 드러나는데, 말로 발설하여 노래함으로써 혀를 그런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매우 적절할 것이다. 혀는 하나님을 향한 찬송을 말하고 선포하기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신자들의 혀는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하여 존재한다!
이 말은 예배에서 찬송하는 것과 음악회 무대에서 부르는 것이 다르다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의 마음이 거룩한 노래(찬송)를 부르는 데 얼마나 집중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칼빈의 입장은 시편 찬송을 만들 때에만 해당하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1547년에 교회 개혁의 한 방안으로 사도가 친히 우리에게 추천한(고전14:15,26) 경건한 시편을 회복할 것을 권하면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시편은 결코 교회에서 파기되어서는 안 된다. 그 동안 교회에서 시편(찬송을 부르는 것)이 중단되어 왔지만, 이제 그것을 회복해야 한다. 특히 주의 날과 그밖에 고대부터 지켜왔던 존엄한 축제일에 그러하다]라고. 칼빈은 이것이 교회를 개혁하고 교회가 분열된 것을 치유하는 진정한 방법이라고 믿었습니다. 성경적인 찬송은 교회를 하나로 만드는, 즉 성경적인 에큐메니칼을 이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편찬송의 정신이 실제로 음악적 요소와 관련해서 어떻게 [제네바 시편찬송가]에 반영되었는가?
1.2.2, 시편찬송의 구성과 음악적 특성
제네바 시편찬송은 시편 150편 중에서 125편에 곡을 붙여 만들어졌습니다.
[제네바 시편찬송가]에 적용된 음악적 원칙, 음악적 요소 등을 차례로 살펴봅니다.
1.2.2.1, 시편찬송가의 음악적 원칙
먼저 우리는 여기서 당대 유명한 종교개혁자인 루터의 종교개혁의 이념과 비교해 볼 때 칼빈의 음악적 원칙은 엄격한 점이 상당히 많았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루터가 로마 가톨릭의 전통을 지키면서 그의 개혁이념에 따라 적절한 수정을 가하여, 음악에 있어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통을 배제하지 않은 루터식 합창을 발전시킨 반면에, 칼빈은 로마 가톨릭 정신을 배제하고 원시 초대교회 전례를 쫓으려 했으며, 교리도 거기에 기초를 두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은 칼빈이 음악 자체에 대해 엄격한 태도를 지녔기 때문은 아니라고 봅니다.
칼빈이 루터처럼 음악을 좋아한 사람도 아니고 음악적인 소양을 갖춘 사람도 아닌 것은 사실이지만, 음악에 대한 칼빈의 입장은 교회에서 부를 수 있는 노래와 관련해서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는 예배에서 부르기에 적합한 찬송의 내용(가사)과 곡조에 관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가 제시한 시편찬송의 음악적 원칙은 그것이 예배용 찬송이라는 사실과 별개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즉 시편을 부르는 것은 단지 한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그는 공동체의 예배 분위기, 공동체 전체가 공감하는 찬송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우선 가사와 운율은 시편의 존엄성이 드러나고 사람들이 예배용 찬송답게 부르기에 적합한 것이어야 했습니다.
특히 칼빈은 거룩한 모임에서 품위와 위엄을 중시했습니다.
그는 [품위]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신성한 신비를 높이 기리기에 매우 적절하여 경건을 위한 행위로 적합하거나 예배 행위에 합당한 장식]이라고 하며. 그런 의미에서 품위는 (찬송을 비롯하여) 거룩한 것들을 행할 때 경건을 증진시키는데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칼빈은 이 원칙에 합당한 찬송가의 가사를 시편찬송가와 십계명, 마리아의 찬가(Magnificat) 등과 같은 몇 개의 찬송에 국한시켰습니다.
나는 분명히 말씀드리거니와 설교에서 거론되는 인물들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사상을 통하여 현대 우리의 참된 하나님을 향한 찬양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분석하고 세상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찬양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게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만일에 우리가 부르는 찬양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 온다면 우리의 구원은 커다란 손상을 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호4:6)[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 기획 특집- 시편으로 찬송해야 하는 이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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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내용중 금칙어 설정으로인해 표준어 문법이 아닌 "쫓"으로 표기하였음을 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