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으로 찬송 해야 하는 이유[4]
또한 제네바 시편찬송가에 영향을 끼친 곡조는 [부르조아]가 고대교회의 음악을 모본으로 하여 만든 것들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제네바 시편찬송가]에는 고대 중세 성가와 관련이 있는 부분이 적어도 10여곡이 있었는데, 그 곡의 대부분은 [그레고리안] 찬트에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제네바 시편찬송가] 129편에 사용된 [Festa Julii]로서 [성 베네딕트] 축제에 부르던 아침찬송에서 온 것입니다.
<그레고리안 찬트-6세기 말 그레고리우스 교황 1세가 집대성한 시편 찬송들로서, 엄숙하고 단조로우면서도 경건한 시편곡을 말합니다. 클래식 음악의 뿌리라고도 할 수 있는 예배용으로 만들어진 음악입니다.>
칼빈의 시편찬송은 기본적으로 단성 곡조로 구성되었습니다.
칼빈은 경험에서 나온 문제에 호소하면서 다성 곡조인 합창 음악의 심리학적인 힘을 묘사합니다.
그는 [노래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불을 지피는 큰 힘과 열정이 있다]는 말로써 음악의 힘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음악의 위험 요소라고 칼빈은 경고합니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식탁이나 가정에서 여흥으로 즐기는 음악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지만, 음악적인 힘이 찬송하는 사람의 마음에 영향을 주지 않게 하려고 교회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부르는 시편은 여흥으로 부르는 음악과는 당연히 차이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일반적인 합창음악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상황에서 사용되는 합창음악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원칙들은 일찍이 깨어져버렸습니다.
1565년쯤 두 가지 내용에 변경이 가해졌습니다.
멜로디는 소프라노 파트가 담당했고, 가정에서 그리고 예배 때 부르는 찬송이 아닌 경우를 대비하여 합창 반주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제네바 시편찬송가]에도 합창이 사용되고 4성부가 부르는 악보가 나옴으로써, 화음 찬송이 한정된 경우에 사용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미 초창기 시편찬송이 단선율로만 구성되지는 않았다는 것과 악기를 사용하지 않는 문제가 칼빈주의 원칙이 상당히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고전14:15-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1.2.3 찬송의 확장
시편찬송은 매우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시편 찬송은 교회에서만 아니라 가정에서, 밭에서, 일터에서, 거리에서, 그밖에 공공장소에서, 심지어 지역 식당에서도 불리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반인들에게만 아니라 음악가에게도 알려졌습니다.
칼빈은 1543년판 [제네바 시편찬송가] 서문에 두 페이지 분량의 내용을 첨가하면서 이런 내용을 권합니다.
<찬송하는 것은 심지어 가정과 들판에서도 우리와 하나님을 찬송하는 한 기관(입)을 자극한다. 그리고 찬송은 우리의 마음을 그분에게로 끌어올리며,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덕과 선하심과 지혜와 공의로우심을 묵상하게 함으로써 우리는 위안을 받는다.>
칼빈이 찬송을 부르는 공간을 확대한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우리가 어리석고 타락한 기쁨의 수단을 찾지 말고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찾아야 한다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칼빈에 따르면, 음악은 사람을 재창조하고 기쁨을 주는 것 중에서 첫 번째 위치를 차지하며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찬송은 이처럼 중대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므로 찬송은 정직하고 거룩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고 존경하고 영화롭게 해 드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묵상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정신이 교회로 하여금 공감을 얻어 시편찬송가는 처음에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시작하여 제네바 전역으로, 아니 그리스도인들이 가는 곳마다 불리어졌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 당시 칼빈주의자들은 시편을 부르는 사람으로 특징이 지어졌고, 칼빈이 주도한 프랑스 종교개혁은 [시편찬송을 부르는] 그리스도인 군대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시편찬송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화란, 독일, 헝가리, 영국 등으로 퍼져나가 개혁파 교회와 장로교회에서 불리어졌습니다.
특히 17세기 영국의 반 국왕파에 속한 크롬웰의 의회당원(Roundheads)과 스코틀랜드의 언약주의자들 등은 전쟁에 나가면서 시편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처럼 어느 공동체가 시편찬송을 부른다는 것은 그들이 개혁파 정신을 따르고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2. 칼빈의 시편찬송가와 그 정신에 대한 평가
이제 칼빈의 시편찬송의 원칙과 그의 업적을 평가해 봅니다.
첫째,
칼빈의 시편찬송가는 [오직 성경]이라는 종교개혁의 원리를 음악적인 용어로 독특하게 표현한 개혁파 찬송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칼빈의 시편찬송가는 로마 가톨릭의 미사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특정한 사람(칸토)만이 부르던 예배용 찬송을 대중들이 부를 수 있도록 했으며, 그것도 자국어로 부르게 했다는 점에서 큰 공헌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편의성 측면에서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편을 부른다는 것은 자신이 로마 가톨릭 교도와 구별된 칼빈주의적 순수 보수성 신자라는 것을 고백하고 누구나 알 수 있게 하는 자기 정체성 천명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둘째,
청교도들이나 재세례파들이 모든 예전 형식을 [타파]하려 한 것과 비교해 볼 때, 칼빈은 예배의 형식과 정신을 [개혁]하려고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대 작금의 교회음악의 형태는 영적으로 볼 때에 이때보다도 더 심각한 정도이기에 교회음악에 있어서 대 각성의 단계를 넘어 대 혁명이 필요하다는 판단입니다. 하나님께서 1975년도부터 교회음악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하시고 개혁의 방법과 지혜를 주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잘못되어져 있는 교회음악을 고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려합니다.>
칼빈은 예배용 음악과 관련하여 기본적으로 [루터]와 [쯔빙글리]의 중간 위치에 서 있던 사람으로 평가됩니다.
[루터]는 시편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노래를 부르는 것을 좋아했고, 교회 음악에 악기를 사용했습니다.
반면에, [쯔빙글리]는 음악가적 소질이 있으면서도 교회 예배에서는 어떤 음악도 사용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쯔빙글리]는 음악이 교회에서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지게 할까 염려하여 교회에서 모든 음악을 거절하였으며, 심지어 그의 추종자들은 교회 안에 있는 오르간을 부수어 버리는데 까지 나아갔습니다.
칼빈은 이 두 입장의 중간에 서 있었습니다.
칼빈이 중도를 지키면서 예배의 개혁을 이끌어 성공한 것은 후대 교회를 위해 잘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이것은 세상에 살면서 세속문화에 끊임없이 도전을 받고 있는 신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우리는 칼빈에게서 세상과 동화되어서도, 세상과 단절해서도 안 되고, 세상을 개혁하느라 계속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만들어낸 노래는 경박하고 이단적, 세속적인 요소가 내포될 수 있다는 우려를 생각한 것입니다.(현재의 시대와 같이)
설령 칼빈의 입장이 예배용 찬송가 문제에만 해당되는 것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칼빈은 음악에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예배에 알맞은 거룩한 노래를 찾느라 음악에 엄격한 태도를 취하면서 성경의 시편만이 예배에 가장 적합한 가사를 담고 있다고 믿어서 시편만을 가장 적합한 찬송가로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찬송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와야 하고 교회 음악은 단순한 여흥(엔터테인먼트)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그의 신학과 사상과 신앙에 맞는 찬송을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더욱이 그는 이해력, 의지, 감정, 혼, 몸 등 사람들 속에 있는 모든 것이 오염되었다는 그의 신학에 의거하여 시편을 운율이 있는 가사로 번역하여 노래하되, 악기 없이 아카펠라(무반주)로 부르는 것을 제안했습니다.
그는 죄의 오염으로 인간이 성경의 인도를 받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로써 칼빈은 칼빈주의 음악의 특징적인 전통을 만든 셈이 되었습니다.
이후에 극단적인 개혁파 교회에서는 실제로 예배에서 시편찬송만을 부르기에 합당하고 공식적인 찬송으로 삼아야 한다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시로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말씀하신 부분이 상당히 나옵니다.
(대상16:9; 시95:2; 엡5:19; 골3:16)등등,
더구나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찬송하기를 요구하신 [새 노래]는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 행위가 있을 때마다 그것을 기념하여 부르던 찬송입니다.
(시33:3; 40:3; 144:9; 149:1; 사42:10; 계5:9; 14:3).
● 새 노래라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영과 마음으로 하는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새로이 작곡한 노래라고 고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상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학습적인 신학만으로 교회음악을 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합당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노래, 이것이 곧 새 노래입니다.
아무리 새로 작곡된 노래일지라도 가사, 또는 장르가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찬양으로 드리지 않는 편이 유익합니다. 왜냐하면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도들은 이미 작곡자가 제대로 알아서 발표했다고 착각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분명한 것은 검증도 없이 발표되고 있는 현실을 재정비하지 않는다면 교회음악의 미래는 너무 불투명합니다.
인간으로서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역사가 자신을 영생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이라는 진리를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거듭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다고 못 박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요3:3,5)[3.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5.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거듭나기 위해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호4:6)[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과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왜 창조 하셨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결국 하나님의 구원에 들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이 비밀을 깨닫게 되면 요한복음3장3~5절의 말씀, 거듭남이 이루어지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가게 될 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광대한 하나님의 나라의 어느 한 분점에 지으신 하늘과 땅을 구태여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은 심판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심판의 목적은 하나님의 원수 단하나 마귀를 멸하시는 것입니다.
(요일3:8)[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하심이니라.]
이때에 마귀의 편에 선 인간은 마귀와 함께 불 못으로 던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은 교회 안에 있는 교인들입니다.
교회밖에 있는 세속인들은 심판을 받을 자격도 없습니다.
(계11:1~2)[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2.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비록 세상이 살기가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따른 성도들은 예비하신 [새 예루살렘]성으로 옮기셔서 아픔이나 고통이나 죽음이 없이 최고의 행복으로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됩니다.
다음의 성경 말씀을 충분히 이해가 될 때까지 반복해서 읽으시기를 당부 드립니다.
(요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곳으로 옮겨지는 것이지 아직 영생을 주셨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게 되나요?
(요17:3)[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유일하신 하나님과 독생자를 알아야 거듭날 수 있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벧후3:6~7)[이로 말미암아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7.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하나님의 천지 창조의 목적을 분명히 알아야 거듭나게 되고 하나님의 유업,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