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특집- 시편으로 찬송해야 하는 이유[1]
16세기 종교개혁의 핵심 구호 중 하나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입니다.
개혁자들은 이 구호를 종교개혁 모든 영역에 적용을 했습니다.
특히 종교개혁 시대에 나온 예배용 찬송가인 제네바 시편찬송가는 [오직 성경]의 구호를 예배와 찬송에 적용하려 한 대표적인 산물이었습니다.
오늘날 시편 찬송만을 부르고, 칼빈주의를 신봉하는 교단과 교회는 그들이 시편찬송을 불러야 하는 정당성을 바로 이 사실에서 찾은 것입니다.
16세기 종교개혁자(그 중에서 칼빈)의 찬송은 21세기의 개혁파 교회들에게 찬송의 의미에 대해 중요한 성경적인 지침을 제시합니다.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의 찬송의 한 예로 칼빈의 제네바 시편찬송가를 예로 들어 칼빈이 시편찬송을 만들게 된 배경과 시편찬송에 들어 있는 핵심 개념과 찬송의 정신을 분석하고 평가함으로써 21세기 한국교회의 바른 찬송의 지침을 얻고자 했습니다.
1. 개혁파 신학과 칼빈의 제네바 시편찬송가
칼빈은 여러 면에서 후대 교회에 지표가 되는 중요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가 쓴 기독교 강요와 요한계시록을 제외한 거의 모든 성경의 의미를 설명한 주석 등은 교회가 믿는 바가 무엇인지, 또 교회가 선포하고 행해야 할 개혁파 신학의 정신과 원칙이 무엇인지를 제시한 작품들이었습니다.
칼빈의 신학 총체만큼 중요한 업적은 그가 제네바에서 만든 [제네바 시편찬송가]입니다.
이 찬송가가 나오게 된 배경과 거기에 반영된 칼빈의 찬송의 정신을 차례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1.1 제네바 시편찬송가가 나오게 된 배경
칼빈이 교회에서 시편찬송을 부르도록 장려하고, 실제로 칼빈이 종교개혁을 수행하는 동안 시편 찬송을 만들게 된 과정과 시편찬송의 정신은 그가 프랑스와 스위스 제네바 그리고 [스트라스부르크]에서 행한 종교개혁 상황에 비추어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는 1538년과 1541년 사이에 스트라스부르크에 머물면서 프랑스 난민들을 대상으로 목회를 했습니다.
그가 이곳에서 목회를 하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습니다.
칼빈이 프랑스 파리에서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 지역에 있던 [스트라스부르크]로 가려고 할 무렵, 프랑스와 독일은 전쟁 중이었습니다.
두 나라를 잇는 도로가 차단이 되어 그는 행선지를 스위스 제네바로 옮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칼빈이 직접 스트라스부르크로 가지 못하고 우회하여 제네바에 잠시 머문 것이 오히려 칼빈의 그 후 사역을 위해서는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그는 거기서 화렐(Farrel)을 만나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이끌어줄 것을 제의 받았기 때문입니다.
칼빈이 제네바에 머물고 있는 동안 교회 예배와 찬송과 관련하여 한 중요한 시도는 1537년1월16일에 제네바 시의회에 제안한 논문이었습니다.
이 논문에서 칼빈은 시의회에 두 가지 중요한 내용을 개정해 줄 것을 요구했는데 하나는 매주일 예배 때마다 성만찬을 베푸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만찬을 둘러싼 치리에 관한 것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삶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칼빈은 이 두 내용을 제안하면서 바른 찬송을 부르는 것과 관련하여 몇 가지 그의 입장을 천명하였습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공적인 기도의 형태로 시편을 찬송으로 부르는 것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에 대단히 유익합니다.
시편찬송은 하나님께 간구하거나 그분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시편을 기도하고 찬송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의 마음은 감동되고 자극을 받아 이와 비슷한 기도를 드릴 수 있으며 동일한 열정으로 하나님께 찬송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찬송에 대한 칼빈의 견해를 엿볼 수 있습니다.
칼빈의 종교개혁의 목표 중의 하나는 교회가 찬송다운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칼빈은 그렇게 하는 것이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 대단히 유익한 일이라면서, 찬송을 교회의 교회됨을 이룩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밝힙니다.
이러한 목적에 합당한 찬송이 바로 시편찬송입니다.
칼빈이 이 논문에서 시편찬송을 부르기를 제안한 이유는 무엇일까?
칼빈의 글을 직접 인용해 봅니다.
한편, 교회에서 불려지기를 열망하는 시편찬송이 있는데, 우리는 고대 교회에서, 그리고 입술과 마음으로 회중가운데서 부르는 것이 좋다고 말한 사도 자신의 증거에서 그 예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적용해 보고 스스로 감동을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이것으로부터 생기는 유익과 교화를 예상할 수 없습니다.
확실히 만물들이 그러하듯이, 신자들의 기도들은 매우 부끄럽고 심지어 황당하기까지 합니다.(마6:33)
시편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상납시키는데 자극을 주며, 우리를 감동하여 그분의 이름의 영광을 찬송하도록 일깨우며 찬송하는 열정으로 우리들을 이끌어 갑니다.
게다가 로마 가톨릭과 그에 속한 자들이 교회로부터 빼앗아간 유익과 위로함이 무엇인지를 고려해 봐야 할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진정한 영적 찬송이 되어야 하는 시편을 이해하지도 못한 채 자기들 사이에서 중얼거리는 것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 글에 따르면, 예배에서 부를 찬송과 그 신학적 근거는 목회적 필요성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시편찬송을 부를 객관적인 이유는 사도(바울)의 증언과 고대 교부들의 제안에 기원을 드는 것입니다.
당시의 예배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미사를 중심한 예배였고, 미사가 진행되는 동안 [칸토]라고 불리는 특정한 사람(성직자)만 찬송을 불렀었습니다.
이에 비해, 칼빈은 어떻게 하면 성경과 초대 교회의 사도적 전승에 따를 것인지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입니다.
그는 당대의 미사를 개혁하여 바른 예배 갱신을 추구하였고, 그 일환으로 교회에서 시편찬송을 부르는 것을 계획하였습니다.
더욱이 성도들과 관련해서는 찬송을 부르는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상승시키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데 시편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 시편찬송을 만들 중요한 이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시편은 성도들의 진정한 영적인 찬송이지만,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성도들에게서 시편을 부를 찬송을 빼앗아 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제네바의 시의회에 제출한 교회 조직과 그 예배에 관한 논문에서 찬송과 관련하여, [전부터 몇몇 겸손한 교회들로 하여금 노래하도록 한 유산들은 모든 사람들이 부르는데 익숙할 때까지 크고 분명한 목소리로 노래하며, 사람들은 모든 주의를 기울여 들으며 진심으로 입으로 불리는 것을 따라해야 한다]라고 제안하였습니다.
하지만 칼빈은 시편을 불러야 하는 목적을 기도의 냉랭함에서 찾아 이 문제가 찬송 자체의 문제보다는 기도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성찬과 치리를 비롯하여) 찬송과 관련된 칼빈의 제안은 훌륭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논문은 시의회에서 대폭 수정된 채 통과되긴 했지만, 사실 칼빈이 제안한 찬송의 정신은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화렐]과 함께 제네바 시의회에 항거하였고, 이것이 관철되지 않자 1538년 부활절 때 성만찬 집례를 거부하고 그해 4월23일 제네바를 떠났습니다.
그 후 칼빈이 베른(Bern), 취리히(Zurich), 바젤(Basel)을 거쳐 마침내 찾은 곳은 [스트라스부르크]입니다.
칼빈이 그 곳으로 가게 된 것은 역동적인 신학자이면서 다른 종교개혁자인 마틴부쩌(Bucer)의 권고 때문이었습니다.
칼빈은 1538년9월에 스크라스부르크로 갔고, 그 곳에서 영구히 살고자 시민권까지 받았습니다.
그 곳은 프랑스 종교개혁의 중심이었습니다.
당시 스트라스부르크는 다양한 복음주의 견해와 로마 가톨릭에 대해 어느 정도 열린 자세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 곳에는 프랑스에서 신앙의 박해를 피해 온 사람들이 500여명 살고 있었는데. 당시 스트라스부르크는 독일령으로 독일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스트라스부르크에서 독일 예배의 분위기에 빠졌으며, 칼빈과 함께 프랑스 예배 의식을 만들어야 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칼빈은 이런 상황에서 교회와 예배의 신학적인 틀을 바르게 제시함으로써 종교개혁을 수행하려 하였습니다.
당시 독일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는 교회마다 루터의 영향아래 루터가 만든 예배 형식을 사용하였는데, 이와는 달리 스트라스부르크 만큼은 상당히 독립적이었습니다.
그 곳에서는 디볼트 슈바르츠(Diebold Schwarz)가 1524년2월16일에 만든 독일어 미사가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칼빈은 이 미사를 개신교의 예배로 전환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칼빈은 미사에 중점을 둔 예배에서 설교에 중점을 둔 예배로 바꾼 것입니다.
당대 미사는 오늘날 거행되는 미사와 달리 기본적으로 청각적인 경험이 아니라 시각적인 경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범한 미사 참석자들은 사제가 미사를 집행하는 동안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없었을 뿐더러, 설령 그 말을 들었다고 하더라도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미사가 라틴어로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칼빈이 설교 중심의 예배로 전환한 것은 [듣는 것]의 중요성을 회복한 것으로 평가되는 것입니다.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칼빈의 예배 개혁에 영향을 준 사람은 부쩌(Martin Bucer)였습니다.
부쩌는 시편과 찬송을 독일어 운율에 맞춰 부르게 하였으며, 라틴어로 된 예배 순서의 명칭들을 서서히 독일어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미사]를 [주의 만찬(성찬)]으로, 바꾸고 [사제]를 [목사]로, [제단]을 [성찬상]으로 명칭 변경을 감행했습니다.
칼빈은 스트라스부르크에서 프랑스 난민들을 대상으로 매일 설교와 강의를 했고, 주일마다 두 번씩 설교를 했습니다.
이처럼 칼빈은 목회를 하면서 교회와 예배의 중요성을 더욱 절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카톨릭과는 달리 대중들에게도 함께 찬송을 부르게 하였습니다.
프랑스 난민들은 매우 기뻐했습니다.
본국 프랑스에서는 예배 시간에 찬송을 부를 수 없었지만, 스트라스부르크에서는 교우들 누구나 제한 받지 않고 찬송을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외국어 노랫말과 합창곡을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러한 문제를 알고 있었지만 처음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는 음악적인 재능이 없어서 루터와는 다르게 자신이 직접 시편에 곡을 붙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우선 대부분의 찬송을 그들이 읽고 쉽게 부를 수 있도록 그들의 언어로 번역해야 했습니다.
그는 교우들을 위해 작곡가인 끌레망 마로(Clement Marot)에게 시편을 불어로 번역하도록 부탁하였습니다.
처음에 마로는 시편 여덟 개를 번역했고, 칼빈 자신도 시편 다섯 개를 번역했습니다.
마로는 여기에 곡을 붙였는데, 마로가 작곡한 곡의 멜로디는 스트라스부르크 도시가 있던 알사스(Alsace) 지방의 민요곡 이었습니다.
이 곡은 교우들 누구나 쉽게 배우고 따라 부를 수 있는 운율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1539년에 불어판 시편찬송가인 [Aulcuns Pseaulmes et Cantiques mys en Chant](노래로 된 시편들과 성시들)이 출판되었습니다.
1539년 시편찬송가에는 시편 1, 2, 3, 15, 19, 25, 32, 36, 46, 51, 90, 103, 113, 114, 115, 129, 137, 138, 142편과 시므온의 노래, 십계명, 사도신경 등 22곡이 수록되었습니다.
이것은 프랑스 종교개혁과 종교개혁 음악 역사에 있어서 대단히 큰 사건이었습니다.
이 찬송가는 남녀노소 누구나 찬송할 수 있는 대중 찬송가였습니다.
더욱이, 회중들은 모국어로 노래했고 그 곡조가 그들에게 익숙한 [알사스] 지방의 대중적인 곡조였기 때문에 주님을 찬송하는 감동이 컸던 것 같습니다.
그 후 칼빈은 1541년에 제네바로 돌아와서 시편찬송에 더 열정을 들여 개신교 이념에 따라 찬송가를 만들어 제네바시에서 종교개혁에 성공하는 또 하나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 것입니다.
제네바에서 작업한 찬송이 처음 나오게 된 때는 제네바 시편찬송가를 착수한지 불과 1년만인 1542년입니다.
보내드리는 시편찬송가를 노래로 부를 수가 없는 경우에는 천천히 읽기라도 해야 합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는 하나님께 찬양이 될 수 없는 CCM을 많은 부분,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CCM심의 위원회)가 시행하고자 하는 현대 CCM의 고치는 일은 워낙에 그 량이 방대하여 약2년 정도는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성도 여러분께서는 이 일이 잘되어 모든 성도들이 진정한 찬양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해 주시기를 당부 드리는 바입니다.
글: 김 성 기 목사
CCM 심의 및 시편찬송가 보급 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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